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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없는 발전

행복지구 2014. 2. 7. 11:25



로널드 라이트의 <진보의 함정>에 의하면 인간은 1960년대 초 자연의 연간 산출의 70% 가까이 이용했지만 1980년대 초에 100%에 이르렀고 1999년에는 125%를 넘었다. 인류의 발전이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의 본전을 파먹어 들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지난해 여름 더위를 더위로 견뎌보겠다고 작심했다가 포기해버린 씁쓸한 고백을 한 바(<한겨레> 2013년 9월27일치 ‘에어컨 디톡스 실패 유감’) 있지만, 그 후유는 은근히 길었다. 추위가 다가오면서 나는 그동안 실내에서는 입지 않던 내의를 입고 외출할 때도 두툼한 누비 코트를 걸치며 전력을 덜 사용하는 방한 조처를 취하는 가운데 내 눈길은 에너지 문제로부터 문명의 붕괴에 이르는 글 대목에 자주 닿았다. 


소심한 기(杞)나라 사람의, 그러나 결코 어리석을 수 없는 걱정으로, 지구가 언젠가는 파멸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분명하게 보여 왔다. 과학과 기술도 모르고 경제학도 불통인 소시민의 단순한 셈으로도, 지구의 자원을 그 재생 능력보다 더 많이 사용한다면 분명 이스터 섬처럼 이 세계가 황폐한 땅으로 파산할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셈법이 소박하기에 그 결론은 오히려 분명했다.


앤드루 니키포룩의 <에너지의 노예>에는 재미있지만 아찔한 실험 하나를 소개한다. 

2009년 네 개의 침실이 딸린 한 가정에서 네 식구가 어느 일요일 으레 사용하는 전기스위치를 올리자 옆집에 모인 한 무리의 자원자들이 100개의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돌려 그 실험가정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그 장면들이 <비비시>(BBC) 방송에 전달되었는데, 오븐에서 열을 내도록 하려면 24명이 페달을 밟아야 했고 토스트 두 장을 굽기 위해서는 11명이 필요했다. 자전거 페달을 돌리던 대부분은 그날 일을 마치자 그대로 쓰러져버렸고 그중 몇 명은 며칠 동안 걷지 못했다. 페달을 밟았던 사람들이 음식으로 섭취한 에너지는 그 페달을 밟는 데 사용한 에너지보다 더 많았다. 이 사태를 본 <가디언>은 “전세계 에너지 자원이 부족해지면 노예제도가 부활하리란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논평했다. 오늘날의 세계는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그것에 필요한 에너지 자원은 점점 줄어들어 언젠가는 채무상태로 허덕일 것이 분명하며 그럴 경우 고대 그리스처럼 노예를 사용하든가 문명의 파멸을 맞아들이든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니키포룩을 인용하면, 1800년에 7000억달러였던 세계 경제 생산 가치는 2000년 35조달러라는 ‘가공할 수치’를 올렸고 여기에 들인 에너지가 20세기는 1900년의 이전 1000년 동안 사용한 에너지의 10배를 사용했고, 지난 100세기 동안 인류가 사용한 에너지는 20세기에 사용한 에너지의 3분의 2였다고 계산한다. 1800년에는 석탄과 말, 인간노예, 바람의 형태로 석유 4억1000만톤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소모했지만, 1990년에는 석탄과 석유 등 화석연료 330억톤을 ‘먹어치웠다.’ 국내총생산(GDP)이 1% 상승하려면 석유 수요가 3%씩 증가해야 하고, 미국인 한 명이 매년 소비하는 석유는 174명의 노예노동에 해당하는 23.6배럴이다. 


로널드 라이트의 <진보의 함정>에 의하면 인간은 1960년대 초 자연의 연간 산출의 70% 가까이 이용했지만 1980년대 초에 100%에 이르렀고 1999년에는 125%를 넘었다. 인류의 발전이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의 본전을 파먹어 들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에너지 과용으로 이루어진 진보가 인간의 자멸을 이끈다는 곳곳의 경고를 듣는 데서 생긴 불안은 당혹을 넘어 당연히 불길한 예감으로 닥친다. 로널드 라이트는 현대 과학기술의 진보와 재화의 과소비는 “변동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산업의 힘에 의해 인류가 자살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했다”고 지적하며, 영국과학진흥협회장 리스는 “우리의 현재 문명이 금세기의 마지막까지 지속할 가능성은 50 대 50을 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화석연료의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는 재생 바이오 연료에 대해,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인 러블록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자동차·기차·비행기 등 교통용으로만 매년 2~3기가톤의 탄소를 태워야 하는데 세계 인구의 연간 소비량이 0.5기가톤이니 지구가 여섯 개 이상 필요하다는 계산으로 비관한다.


물론 이런 경고에는 협박만이 아니게, ‘현재와 같은 상태라면’이란 전제가 붙어 있다. 


예언이란 것이 인간의 무수한 변수에 대한 고려를 다 할 수 없어 틀리게 되는 것이 마땅한데, 비관적 인구론을 제기한 맬서스가 산아율의 하강과 식량 증산 기술의 발전을 예측하지 못해 그 전망의 적실성을 잃고 만 것도 그런 예다. 1970년대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석유 고갈론과 에너지 위기론도 그 후의 새로운 유전 발견과 채유 기술의 개선, 셰일가스와 식물유 개발, 풍력·조력·지열 등 자연-재생 에네르기의 활용 등 새로운 대체 에너지를 발굴·이용함으로써 석유종말론을 유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석유파동은 끈질기게 제기되고 출렁이는 유가가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아무리 밝은 청사진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유한한 지구가 인간의 무한한 소비 증가를 감당 못할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지구 인구의 반을 넘는 중국·인도 등 개발 국가들이 미국 같은 선진 생활수준에 이를 때 소요될 그 막대한 에너지양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의 하인버그는 이런 비판적인 전망에서, 인구와 소비의 증가는 지속될 수 없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자연적인 보충보다 더 빨리 소비하면 안 된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소비 속도를 늦추고 최대한 재활용해야 한다, 폐기물을 최대한 줄이고 인간과 환경에 무해하게 바꾸어 식량과 원료로 삼아야 한다는 등 새로운 원리의 경제학을 제창하며 인간행복지수를 내세우는 부탄의 ‘느릿느릿 발전 방안’을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사람이 과연 더 낮은 문화 상태로 퇴영할 수 있을까라는 이유로 부탄의 행복지수 개념에 회의하는 내게 그 방향의 정책적인 구상을 독촉하는 책이 원제(Enough is Enough)보다 더 멋진 제목으로 번역된 디에츠와 오닐의 <이만하면 충분하다>였다.


“더 많이의 광기에서 충분의 윤리로 목표를 바꾸고 성장의 한계를 받아들여 지구의 생명 유지 시스템을 훼손하지 않고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경제를 건설”할 것을 제의하는 이 책은 1908년부터 2008년 사이 세계 인구는 15억에서 68억으로 4.5배, 1인당 국내총생산은 7600달러로 6배 증가했으며 이 때문에 1세기 전보다 현재 11배의 에너지와 8배의 물질을 사용한다고 계산한다. 지구 생태계 용량의 8분의 12로 과소비하는 오늘의 경제성장주의를 지양하여 ‘역성장’(degrowth), 적어도 ‘지속가능한 세계’로 만들어야 하고 ‘더 많이’의 욕망에서 ‘충분’의 윤리로 반전해야 할 것을 요구하면서, 하인버그의 ‘부탄으로의 귀환’을 좀더 실현가능한 정책인 ‘정상상태경제론’으로 구체화한다. 이 제안에서 제안되는 ‘참 진보지표’는 국민경제에서 재화(goods)만 계산하고 환경파괴, 재앙, 범죄 등 악화(bads)는 제외한 ‘국민 총행복’ 개념을 도입하는 실질적 행복의 정책들을 포함하고 있다.


1만년 전의 농업혁명, 200년 전의 산업혁명에 뒤이은 21세기의 지구적 파산을 우려하는 하인버그의 비관론과, 케빈 켈리의 <기술의 충격>이 지목하는 ‘바이오, 인포, 로보, 나노’ 등 4-O의 새로운 기술 혁명의 낙관론 앞에 동시에 닥쳐오는 자원과 에너지 고갈 문제를 어떻게 견뎌내야 할 것인가. “진보란 인간의 자멸을 위한 함정”이란 위기의식에서 ‘제로 성장의 문명’이란 대전환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의 거대 변화에 대응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체제를 극복하고 21세기적 행복 추구의 새 경제-윤리학 구도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정작, ‘성장 없는 발전’이란 그 모순어법의 과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잖은 아포리아인 것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각주:1]

  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22963.html?_fr=mr1 [본문으로]